2016년 2월 29일 월요일

(하나님의교회/패스티브) 죽어도 여한이 없다

죽어도 여한이 없다. 지금 당장 죽어도 남아 있는 한이 없을 만큼 최선을 다했고 노력을 다했다는 뜻이다. 도대체 자신의 삶과 일에 얼마만큼 마음을 다해야 한이 남지 않을까? 얼핏 들으면 굉장한 자부심과 성취감으로 충만한 사람의 말처럼 들리기 쉽다.
 
역사적으로 알렉산더 대왕만큼 마음을 다해 자신의 제국을 이끌어간 사람도 드물다. 그는 인도에서 마케도니아까지 8,000km의 광활한 영토를 불과 8년 만에 정복했다. 33세에 운명을 달리했으니 그는 젊은 세월을 온통 전장에서 보낸 셈이다. 죽을힘을 다한 노력의 결과로 그는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간 것은 그의 몸이 묻힐 한 평의 땅이었다.
 
알렉산더 대왕은 죽기 전, 손을 무덤 밖으로 꺼내 달라고 유언했다고 전해진다. 사람들에게 인생은 공수래공수거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천하를 다 가진 그였지만 죽어서는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음을 깨닫고 얼마나 원통했을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어디 살면서 한맺힌 이가 알렉산더 대왕뿐이겠는가. 2천 년 전,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장본인은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유대인들이었다. 나름 율법을 고수하며 자신들의 신앙을 최고라 자부하던 그들이었다. ‘하나님은 절대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그들의 고집은 얼마나 큰 한을 남겼는가.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며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요구할 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죽어도 여한이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예수만 사라져준다면 내가 죽고 자손들이 죽어도 결코 후회하지 않을 일이라 자신했던 것이다.
 
만약 그들을 만날 수 있다면 묻고 싶다. “예수가 죽어서 정말 여한이 없었는가?”라고 말이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늘에서 이 땅까지 오신 하나님을, 더군다나 자신들이 그토록 열심히 믿고 공경했던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조롱하고 배척한 것도 모자라 십자가 형벌이라는 엄청난 고통과 수욕을 안겨드렸으니 그들의 원통함이 어떠할지 우리는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예수만 죽는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만 같았던 그들의 결과는 오히려 사무치는 한을 가져왔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지 40년이 지난 A.D. 70, 로마 장군 티투스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어 110만 명의 유대인들이 사망하고 97천 명이 포로로 잡혀가는 끔찍한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약 2천 년이 지나고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에도 독일의 나치에 의해 유럽 각국에 흩어져 살던 600만 명의 유대인들이 학살당하는 참극을 겪었다. 이것은 단지 유대인들만의 한이 아니라 온 인류의 비극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겠는가. 하나님을 대적한 그들의 말로는 영원한 천국이 아니라 꺼지지 않는 지옥 불못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어리석은 자신감을 가진 자들은 오늘날에도 많이 있다. 하나님에 대한 무지로 이 땅에 두 번째 오신 예수님을 조롱하고 멸시하는 일에 목숨을 다하고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외치고 있다. 성경의 예언을 따라 오직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땅까지 오신 성령 안상홍님과 신부 되신 하늘 어머니를 훼방하는 자들의 말로는 유대인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진정 구원을 바란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성경을 살펴보라. 노력 없이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아보려는 아주 작은 노력만 있었어도 유대인들은 그렇게 원통한 일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 이르기 전에, 뒤늦은 후회를 하기 전에 성경을 통해 원없이 하나님을 알고 믿었노라 자부한다면 그이야말로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